'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하면 빠지지 않고 그 이름을 올리는 빠에야(paella). 발렌시아를 대표하는 요리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사실 빠에야가 정말 스페인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인지에 대해서는 빠에야를 사랑하는 나 조차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발렌시아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큰 역정을 내겠지만).
스페인은 각 지방 지역마다 그 풍습과 특색이 워낙 뚜렷하다. 발렌시아에서는 빠에야가 전통 음식이지만 내륙의 까스띠야 라만차나 북쪽의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오랫동안 이어온 또 다른 전통이 있기 때문에 스페인이라는 하나의 국가 이름 아래 일관된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빠에야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외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건 19세기에 열렸던 세계 엑스포 박람회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이 박람회에서는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자신들의 나라가 가진 자원과 앞선 문물을 소개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유했는데 스페인의 경우 발렌시아 출신 요리사들을 데려가 빠에야를 선보였고 이를 통해 해외에도 빠에야가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튼 여러 블로그에서 빠에야를 흉내내서 만든 것을 레시피로 올리는 것을 보아오다 보니 빠에야의 본고장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한 번은 꼭 빠에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날인듯 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어인 Paella는 La paella valenciana, 즉 발렌시아 표 빠에야를 지칭하는 단어이며 빠에야를 만드는 얕고 넓적한 팬 역시, 같은 단어로 불린다.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레스토랑 정문에 세워진 입간판에 Paella de verduras(야채 빠에야), Paella de marisco(해물 빠에야)등의 메뉴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이 메뉴들은 발렌시아 사람들이 빠에야라고 부르는 그 빠에야가 아니다. 실례로 발렌시아 사람들은 타 지역(특히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전통 레서피를 따르지 않고 온갖 재료를 넣어 만든 빠에야를 Arroz con cosas(해석하자면 무언가가 들어간 쌀 요리, 잡탕밥 정도 되겠다)라고 부른다. 발렌시아에서 나는 재료들을 바탕으로 전통 조리법에 따라 만들어진 La paella valenciana만이 빠에야라고 불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라는 것이, 문화라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일텐데 뭐 이리 복잡하고 까탈스럽게 구느냐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고집스러움은비단 발렌시아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각 지방에서는 그 지방 고유의 음식을 요리할 때 얼마나 전통 레시피를 충실히 따랐는지 또 얼마나 재료 본연의 특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살리려고 노력했는지를 중요시 생각한단다.
그놈의 전통, 전통. 변화의 물결도 받아들여야지 독불장군처럼 자기들 것만 고수해서 어찌 발전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충실히 이어나가려는 자세는 어떤 면에서 우리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런 고집스러움이 있었기에 빠에야가 그저 관광객들만을 위한 요리가 아닌 여전히 발렌시아 사람들의 일상 속에 녹여져 살아 숨쉬는 요리로 이어져 갈 수 있는 것이리라.
자, 그러면 빠에야의 재료와 요리 방법을 자세히 살펴보자.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빠에야를 만들 때 발렌시아 지방 안에서 조차도 지역에 따라 더하고 감하는 재료들이 차이가 난다. 하여 오늘 이 블로그에 올리는 빠에야 레시피는 기본형이라 할 수 있겠다.
1. 재료( 4인분 기준)

시부모님께서 시골집에 가서 빠에야를 해 먹자고 하셔서 쾌재를 부르며 냉큼 따라나섰다. 발렌시아 사람들은 가족 혹은 친구 모임이나 중요한 행사(축제, 선거 캠페인 등등)가 있을 때면 으레 빠에야를 만들어(혹은 주문해) 함께 먹는다. 이때 볼 수 있는 것이 Paella a la leña인데 가스레인지가 아닌 장작불을 피워 만드는 진정한 전통 스타일의 빠에야라고 할 수 있다.
요리왕, 시어머니께는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지만 워낙 장작불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아 요즘은 야외에서 빠에야를 만들때도 가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도구 없이 빠에야 팬을 지지하는 삼발이만 놓고 요리를 하는 터라 재료 샷이 살짝 투박하다. 하지만 오히려 화려하지 않아서, 평범한 일상을 담아낼 수 있어서 더 정이 간다.
1. 닭고기 & 토끼고기 (토끼 고기를 구할 수 없다면 닭고기만 준비해도 괞찬다) 총 1,5kg
2. 발렌시아 산 컵질콩 ferradura y rochet 두 줌(200g 정도), garrofó 한 줌(100g)
3. 쌀 400g (Bomba나 Albufera를 추천!)
4. 미리 살짝 데쳐 둔 까라꼴(달팽이 종류-없어도 무방하다)
5. 발렌시아 산 토마토 간 것 300g
6. 샤프란, 삐멘똔 둘세(파프리카 가루), 소금, 올리브 오일, 발렌시아 수돗물, 로즈마리(로메로)
위의 사진에는 없지만 제철이 되면 아티쵸크라고 알려진 알까쵸빠를 첨가하기도 한다.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시어머님이 한마디 하신다.
"Todo de Valencia. Todo de la tierra."
그렇다. 빠에야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빠에야를 만들 때 사용하는 모든 재료는 다 발렌시아에서 자라고 난 것들이다. 그런 게 어딨냐며 기가 차 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발렌시아 사람들에게는 해물 빠에야나 바르셀로나에서 만들어진 빠에야가 전통 빠에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물 조차 발렌시아의 수돗물을 이용해야 하니 발렌시아 밖에서는 제대로 된 맛을 보기가 힘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듯 하다. 발렌시아 사람들 말에 따르면 발렌시아 물에 포함된 석회 물질이 빠에야에 특별한 풍미를 더한 단다. 하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도 없거니와 외부 사람들이 빠에야를 흉내내는 걸 막아보고자 그런 거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2. 조리 과정

-평형을 맞춘 삼발이 위에 빠에야 팬을 올리고 올리브 오일을 팬에 두른다. 오일의 양은 팬을 다 덮지 않을 정도로만 넉넉하게 두른다. 이때 빠에야 팬의 수평을 맞추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다. 팬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한 쪽의 재료들이 타거나 설익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오일을 태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불의 세기를 약하게 해야 한다.
발렌시아 사람들은 빠에야를 만들 때 오렌지 나무를 땔감으로 주로 사용한다. 다른 재료들과 마찬가지로 발렌시아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거니와 특유의 향이 빠에야의 풍미를 끌어올려 주기 때문이다.

- 올리브 오일이 어느 정도 달궈지면 작게 자른 닭고기 조각을 오일에 넣어 본다. 튀김을 할 때의 소리처럼 고기가 천천히 익기 시작하면 오일의 온도가 적정하게 맞춰졌다는 뜻이다. 준비된 닭고기와 토끼 고기를 팬에 올려 놓고 소금 한 큰 술을 넣는다. 이때 고기를 익혀야 하므로 중불이 될 수 있도록 장작을 더한다.
토끼 고기는 닭고기와 비슷하지만 식감이 더 쫄깃하고 좀 더 튀는 맛이다. 빠에야에 토끼 고기가 들어간다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그걸 어떻게 먹냐며 손사래를 치던 나였다. 하지만 닭고기인 줄 알고 먹었던 그것이 토끼 고기인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가리지 않고 열심히 먹는다. 어차피 장금이 급 미각을 가진 것도 아니니 가릴 것이 무엇인가.
사실 과거 Catarroja나 Silla, Sueca 지역에서는 물쥐(marjal) 고기를 넣어 만든 것이 전형적인 빠에야였다고 한다. 물쥐라고 해서 헉! 하고 식겁할 수도 있지만 이 물쥐는 우리가 가끔 발렌시아 시내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런 쥐가 아니라 알부페라 주변에서 사는, 벼와 채소류를 먹고 자라는 종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배고프고 식량자원이 부족한 시대에 구하기 힘들고 비싼 일반 가축류의 고기 대신 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쥐를 잡아 빠에야를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물쥐들이 벼농사를 망쳐놓기 일쑤였다고 하니 물쥐 고기를 빠에야에 이용하는 것은 당시 농부들에겐 일석이조가 아니었나 한다. 이후 19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며 생활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하고 물쥐고기 대신에 토끼 고기나 닭고기로 조리를 하여 현재의 빠에야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빠에야가 서민의 음식으로 기능해 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 고기가 타지 않도록 가끔씩 확인을 해야 하지만 자주 뒤집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한쪽 면이 황갈색(마이야르 현상이라고 하던가?)으로 변하며 익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고기들을 뒤집어 준다. 이때도 고기를 태우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 과정은 추후 물과 함께 빠에야의 베이스가 되는 육수를 내고 고기들의 수분을 가두기 위함이다. (약 15분 정도 소요)

-고기의 양면이 노릇하게 익혀지면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뚝뚝 잘라 놓았던 콩류를 팬에 넣는다. 이때 Rochet은 화학 작용으로 인하여 표면의 색깔이 자주색에서 녹색으로 바뀌게 된다.

- 토마토 간 것을 팬에 넣어주고 다른 재료들과 잘 섞어가며 수분을 날려 준다. (10분 정도)

- 삐멘똔 둘세 두 작은 술을 넣고 재빨리 휘리릭 재료들과 섞어 준 뒤(삐멘똔 둘세가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간은 최대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준비해 놓은 수돗물을 빠에야 팬의 손잡이 부분(팬 안쪽을 보면 손잡이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쪽에 작은 원이 두 개 자리잡고 있다. 거기까지다!) 까지 물을 붓는다. 이 방법은 발렌시아에서 전통적으로 해 온 것으로 따로 물의 무게나 부피를 잴 필요가 없다.
- 장작불을 세게 올려 10-15분정도 익혀 준다.

- 샤프란을 조금 넣어주고 까라꼴도 넣어준다. 시어머니께서 육수 한 수저를 떠서 맛을 보라고 건네주신다. 올리브 오일이 많이 들어가 느끼한 건 아닌가 걱정을 했으나 웬걸. 고기의 풍미는 물론이고 각종 콩류의 고유한 맛까지 하나하나 다 느껴진다. 흑 아무리 연습을 해도 내가 이런 맛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사실 딱 한 번 장작불을 이용해서 빠에야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물론 불 조절은 신랑과 친구들이 담당했다) 절반은 타고 절반만 먹을 만 했던 슬픈 추억이 있다. ㅠㅠ

- 쌀을 팬 정 가운데에 선을 긋듯 부어 준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빠에야 팬 사이즈가 달라져도 쌀의 무게를 따로 재서 준비할 필요가 없다.

-로메로를 넣어주고(없으면 생략) 육수가 쌀에 스며들 때까지 끓여준다. 시어머님 표현으로는 육수가 졸여지며 육수 위에 비가 내려 쌀 위로 구멍이 송송 송송 생길 때 까지(como si lloviera) 기다리면 된단다.
쨔란!

- 빠에야가 완성되면 불을 빼고 남은 육수가 각 재료들에 스며들도록 완성된 빠에야를 십 분정도 그대로 둔다.
아, 포스팅이 너무 길어질 듯 하다 ㅠㅠ 아무래도 2편으로 넘어가야 할 듯하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빠에야 먹는 법과 빠에야 관련된 재미난(?) 일화들, 발렌시아 표 쌀 요리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 Hasta la siguei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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