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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생활기

발렌시아에도 미술관은 있다

흔히들 스페인 미술관 하면 마드리드를 떠올리리라. 잘못된 연상은 아니다. 프라도, 레이나 소피아, 티센 등 굵직한 미술관들 외에도 소로야 미술관 등 소규모의 미술관들도 수준급의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으니 제한된 일정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여행객의 입장에선 마드리드 만으로도 벅차다. 게다가 3대 미술관은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하여 한 미술관에 하루를 온전히 투자하여도 제대로 다 둘러보기가 힘이 든다. 그리고 사실 하루 종일 예술품을 보고 있노라면 나중에는 뭐가 뭔지 구분도 안 되고 숙제를 마치듯 얼른 휙 둘러보고 관람을 마치기 일쑤다. 내가 마드리드에 살았다면 연간 회원권을 끊어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 시대나 보고 싶은 파트를 정해 시간을 들이며 천천히 즐겼을 것이다.

발렌시아에도 미술관은 있지만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을뿐더러 소장 목록이나 숫자만 보더라도 마드리드의 그것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여행안내 책자나 온라인 사이트에도 미술관 목록이 나열되어 있지만 유럽 단체 여행객을 제외하고는 직접 발품을 팔아 미술관을 찾는 여행객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생활자가 아니던가.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규모가 작고 관람객이 적은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덜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감상할 수 있으니 그나마 문화 시설이 있는 도심에 살고 있는 걸 감사히 여길 일이다.

첫 번째로 둘러볼 미술관은 Museo de Bellas Artes de Valencia이다. 1837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이곳은 스페인 정부가 수도원에서 거둬들인 작품들로 (1835-1837년 사이에 벌어진 Desamortizacion española의 결과) 소장목록을 채워 El edificio de Temple(현재 복원 중으로 el museo de bellas artes de Valencia 건물에서 강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를 거쳐 -현재 위치가 아닌- Carmen Calzado 수도원에서 1839년 그 문을 처음으로 열었다고 한다. 이후 스페인 내전을 거치며 건물이 무너지고 소장품들 중 일부를 마드리드로 옮기는 등등 의 사건을 겪으며 신학교였던 El colegio Seminario de San Pio V로 이관을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가 보게 되는 미술관 건물은 이 학교(아래 사진 상 두 개의 탑이 있는 건물)와 수도원 건물(파란색 돔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합쳐진 형태인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푸른빛의 거대한 돔이 시선을 잡아 끈다.


1층은 Primitivos Valencianos라고 불리는 섹션이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종교 미술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뭐랄까 의무감에 관심이 가지 않는 작품들을 바라보다 지쳐가고 있을 때쯤 반가운 방이 나타났다. 바로 발렌시아 출신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져 있는 곳이었다.

Paseo a orillas del mar- 호아킨 소로야(이미지 출처-구글)

호아킨 소로야는 자신이 태어난 발렌시아의 바닷가와 지중해의 풍경 및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마드리드에 소로야 미술관이 있는데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꼭 가 보시길 추천한다. 사실 발렌시아 출신으로 발렌시아의 풍경을 담아낸 것으로 유명한 소로야의 주요 작품들이 이곳 발렌시아가 아닌 마드리드와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발렌시아 입장에서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 하여 이곳에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소로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둘러볼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느낀 바로는 소로야의 그림들은 붓터치가 섬세하지 않은데도 거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준다. 빛이 반짝이는 느낌이 전달되어져 나온달까. 소리로 치자면 샹들리에 잔이 살짝 부딪힐 때 퍼져 나오는 소리를 화폭에 담아 놓은 듯하다.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근처 바닷가에서 발렌시아의 햇살을 직접 받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2층으로 올라서면 17-19세기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바로크 미술의 팬인 나로서는 이곳의 전시품들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다만 천장의 중앙 조명을 제외하고는 개별 작품에 대한 조명 배치가 거의 되어있지 않아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사실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미술관은 IVAM(Institut Valencia d'Art Modern)이라고 불리는 발렌시아 현대미술관이 아닐까 한다. 현대 미술이 그저 난해하기만 한 나에게는 꼭 추천하고픈 매력적인 공간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시각과 표현 기법을 감상할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IVAM 외부. 주로 조형물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한다

게다가 IVAM은 스페인 근현대 미술의 출발에 큰 영향을 미친 Julio Gonzalez와 Ignacio Pinazo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Mascleta-Ignacio Pinazo

한동안 발렌시아에 있는 여러 미술관에서 Ignacio Pinazo와 관련된 전시들이 많이 열린 덕분에 나 역시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족, 누드, 일상 풍경 등의 테마를 그린 그는 인상파 화가, 그리고 소로야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인상파라고 하면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았던 화가들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작품과의 만남이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주로 사용하던 블랙, 브라운의 어두운 톤 때문인지 아니면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빠른 붓터치 때문인지 묘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다. 아, 미술에 배움이 부족한 것이 속상하다. 좀 더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IVAM이 이그나시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라도 한 번은 가볼 만하겠다. 아, IVAM 을 갈 경우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이그나시오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는 곳이 IVAM 건물 왼쪽(야외 카페 옆쪽)에 따로 입구가 있어 전시실을 그냥 지나치거나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관람객도 꽤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메인 건물에서 입장권을 받고 둘러본 뒤 입장권을 꼭 지참하시고 건물 밖으로 나와 외부 테라스 카페 옆에 위치한 이그나시오의 전시실을 들려 보시길 당부드린다.

세 번째로 소개할 곳은 Centro del Carmen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입구는 평범하지만 사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과거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현재는 미술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등을 위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 있는 특별 전시가 열리기도 하지만 내가 이 곳을 가끔 찾는 이유는 바로 사진에 나와 있는 고딕 스타일의 회랑(cloister)때문이다. 관람객이 많지도 않거니와 아름다운 고딕 건축을 바라보며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입장료(2유로)가 그다지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다음으로 둘러볼 곳은 MuVIM(Museo Valenciano de la Ilustracion y la Modernidad)이라고 불리는 일러스트레이션&현대 미술관이다.

이곳은 특별 전시가 주를 이루는 곳-IVAM보다 규모가 작다-으로 다양한 현대 미술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과거 발렌시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의 성벽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의 기념품 샵 바깥쪽으로 야외 바가 있는데 햇볕이 좋은 날에는 커피나 맥주 한 잔을 하며 여유를 부려 보시기를 추천한다. 게다가 바로 옆에 유명한 도서관-과거 병원이었던 곳으로 내부가 아름답다-이 자리해 있어 함께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 여담이지만 카페를 지나 메인 입구의 뒷편으로 가면 K-POP을 틀어 놓고 춤연습을 하는 스페인 청소년들을 자주 볼수 있기도 하다. ㅎㅎ

다음으로 둘러볼 곳은 Fundación Bancaja이다.

건물부터 뭔가 부티가 나지 않는가. 이곳은 El Monte de Piedad de Fundación Bancaja라는 일종의 대부업체(?)의 후원을 받는 곳인데 그래서인지 발렌시아에서는 보기 힘들 법한 좋은 전시회들이 자주 열려 전시회 정보 업데이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현재는 데이비드 호크니를 비롯한 영국 예술가들과 소로야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은 가장 최근(2017년)에 문을 연 종합 문화 공간(미술관으로 한정하기엔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주관한다), Bombas Gens Centre d'Art이다. 과거 공장 부지였다가 버려졌던 공간을 이용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 당시 지어진 방공호와 중세시대 와인저장고도 보수하여 외부에 공개(가이드 투어로만 가능)를 하고 있다.
Bombas Gens에서는 사진이나 조각을 포함하는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DJ Sessions, 워크샵 등의 실험적인 문화 행사를 주최하기도 한다.

Bombas Gens의 아름다운 정원(이미지 출처-Bombas Gens사이트)
방공호(이미지 출처-Bombas Gens사이트)
와인 저장고
와인 저장고


미술관 투어를 계획에 넣고 발렌시아에 오시는 분들이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시간의 여유가 있으시다면 혹은 이곳 발렌시아에 살고 계신다면 위의 목록 중 한 곳 정도는 방문해 보심이 어떨까 한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대가들의 작품 감상도 좋겠지만 전혀 알지 못하던 작가의 작품에 매료되어 새로운 세계로 발 디디는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