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카카오톡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WhatsApp"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Telegram과 더불어 유럽 친구들이 많이 사용하는 메신저 중의 하나인데 2015년도에 발행된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내에서 이 애플리케이션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가 스페인이란다. 이 보고서 하나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랑도 이 애플리케이션의 사용자 중 한 명인데 그의 핸드폰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메시지 알림 음이 울려댄다. 대체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 것인지 물어봤더니 정치, 경제 사회 전반뿐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란다. 나 역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말이지. 그렇다고 자주 못 보는 친구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매 주말마다 저녁을 함께 하거나 맥주 한잔을 함께 하는 이들이다. 이쯤 되면 다들 매우 한가하거나 혹은 친구들과의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일정 그룹 혹은 집단에 속하여 socializing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개인보다는 집단성이 강한 문화라고 해야 할까. 혼자 하는 여행도 어느 정도 일반적이 된 우리나라와 달리 홀로 여행하는 스페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정도로 그룹을 형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리에 속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조금은 이상한 사람 혹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간혹 치부될 수도 있다고 하니 이러한 성향을 가지지 않은 스페인 사람에게는 굉장히 피곤한 분위기일 수도 있겠다.
하여 내게도 피곤한 부분이 생기고 말았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즐기는 편인데 신랑은 뭐든지 함께 하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다 같이 만나는 것을 좋아하니 가끔 내키지 않는데도 같이 따라나서야 할 때가 있다. 물론 다들 따뜻하고 좋은 친구들이지만 관심사도 다를 뿐더러 온갖 은어와 속어가 난무하는 대화를 따라가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어느새 내 에너지가 방전되어 버리고 만다.
스페인 사람들은 만나서 인사를 할 때 besos, 두 번의 키스를 상대의 오른쪽 뺨에 한 번, 왼쪽 뺨에 한 번 한다. (당신이 지인들과 입술 박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순서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도 일인 것이 친구들을 만나면 일일이 두 번씩 뽀뽀를 해야 한다. 늦게 오는 누군가가 있는 경우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테이블에서 일어나 줄을 서 기다리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사실 이 정도는 정감 어린 문화라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헤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이를 가리켜 신랑에게 "스페인식 3단계 good-bye"라고 투덜거린 적도 있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집에 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자, 이제 그만 계산하고 나서자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서는 이어지는 수다. 한참이 지나서야 계산서를 요청하고 지불을 마친다. 이제 가겠지라고 외투를 입고 가방까지 둘러메는데 다들 수다 삼매경이다. 성격 급한 한국인, 뻘쭘하게 자리에 앉아 대화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이제 일어서자며 드디어 엉덩이를 의자에서 뗀다. 레스토랑이나 바의 밖으로 나가자 또다시 대화가 이어진다. 집에 가자며 볼에 뽀뽀까지 하고 인사를 마친다. 이제 정말 가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대화가 시작된다. 당최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 걸까. 그러기를 몇십여분 이젠 정말로 가자며 다시 뽀뽀를 하고 작별 인사를 한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남의 볼에 뽀뽀만 몇 번 한 건지 모르겠다.
이런 문화가 처음엔 신기하기도 했고 지치기도 했지만 이젠 나도 그러려니 한다, 아니 어쩔 땐 내가 새로운 대화 주제를 들이밀기까지 한다. ㅎㅎ 이것은 비단 젊은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신랑 친척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우리는 거실에서 집 밖 주차장으로 나와 차에 탈 때까지 3단계에 걸치는 과정을 밟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가 걸렸을 것 같은가. 자그마치 1시간 반이다. 나는 그래서 신랑이 "이제 곧 집에 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만큼 사람들과의 교류를 즐기는 그들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말하기가 좋아서 혹은 지나치게 여유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 이러한 단계 아닌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상대방을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장이나 상점에 가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스페인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 오면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앞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슬쩍 운을 띄우며 대화를 건넨다. 한국에서조차 물건을 파는 사람과 특별히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이런 능력이 신기하기만 하다. 하여 계산대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하게 감수해야 할 상황이 되고 당신이 "Hola.", "Gracias." 등의 기본 문장들의 발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불만 마친다면 차가운 혹은 무례한 사람으로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문화는 비단 스페인만의 문화는 아니다. 유럽에서는 상점에 가더라도 기본적인 인사와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기본 매너로 통용된다. 진심이 담겨 있던 아니든 간에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도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상대적으로 내성적이고 감정 표현을 꺼리는 내가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스페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예의에 어긋날까, 상대가 저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싫어하는 것도 내색하지 않았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그걸 왜 표현하지 않냐며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배려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제일 중심에 놓을 수 있는 그들의 문화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사람이 자꾸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다 보면 곪기 마련이고 제 살을 깎아 먹기까지 한다. 희생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용인될 수 없겠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기적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을 꿈꾼다면 내가 너무 이상적인 걸까.
그 어느 곳도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만큼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기에 살게 되면서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도 있다. 사실 나는 조바심도 걱정도 많다. 예민하기까지 하여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내 스스로를 들볶기도 했다. 그런 내가 "mañana(내일, 내일 하면 되지!)"를 외치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스페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으니 그 처음이 얼마나 답답했을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나를 내려놓고 나에게 여유를 허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만 같던 내 신경 줄을 조금은 부드럽게 해주고 있다. 혹자는 그들을 게으르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걱정은 아무리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걱정을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어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걱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느니 그저 잊어버리고 오늘을 즐기는 것이 낫다. 내일은 어쨌든 다가올 것이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면 된다. 내일 걱정을 오늘로 당겨하다가 오늘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오늘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자, 그럼 이쯤에서 나도 외쳐 봐야겠다. "Hasta mañ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