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먹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행위이다. 그래서 오늘은 스페인 사람들의 식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 까 한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먹고 마신다는 행위는 단순히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행위 그 이상의, 삶의 질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과 중 식사에 할애하는 시간 역시 상대적으로 많다.
먼저 desayuno(데사유노)라고 불리는 아침 식사는 기나긴 다섯 끼의 시작이므로 간단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Almuerzo(알무에르조)를 생략하는 이들은 조금 더 거하게 먹기도 한다.

일반적인 메뉴는 커피, 빵, 주스 정도인데 빵의 경우 크로와상이나 막달레나라고 불리는 머핀을 두어 개 먹기도 한다. 주스의 경우 마트에서 사 온 것을 마시기도 하나, 오렌지 주스 짜는 기계가 집집마다 있어 신선한 주스를 직접 갈아 마시기도 한다. 특히나 발렌시아는 오렌지 산지로 유명한데 제철 오렌지로 갈아 만든 주스는 유기농 브랜드의 그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달고 신선하다. 참고로 발렌시아가 오렌지로 유명하다 보니 거리 곳곳에서 오렌지 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관상용으로 심어진 것들이므로 직접 따서 먹어보는 것은 말리고 싶다. 대신에 요즘에는 마트에 가면 직접 주스를 짜는 기계가 있어 신선한 주스를 내 손으로 만들어 가져올 수가 있다.
제철에는 시장이나 마트에서 주스용 오렌지를 1kg에 1-2유로 정도의 가격으로 살 수 있으니 스페인을 여행하신다면 꼭 드셔 봐야 하는 것 중 하나라고 하겠다. 정말 상황히 여의치 않으시면 "Don Simon"이라는 브랜드에서 나오는 제품들이 가격 대비 맛도 좋으니 마트에서 장을 봐서 매일 아침식사에 곁들이시면 좋겠다.

발렌시아 산 오렌지는 1년 중 11월에서 3월까지가 제철인데 이 기간 중 생산된 오렌지로 잼을 만들 때에는 설탕을 절반 이하로 넣어도 될 정도로(일반적으로 과일 잼을 만들 때에는 설탕의 양이 과일의 절반 이상이 되어야 한다.) 당도가 높으니 기간이 맞다면 꼭 맛보고 가셨으면 좋겠다. 덧붙여 발렌시아에 오신다면 이 오렌지 즙을 보드카와 같은 sprit에 섞은 "Agua de Valencia"를 꼭 마셔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이렇게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일터로 향한 뒤 허기가 밀려오면 알무에르조 타임을 갖는다. 알무에르조(almuerzo)란 12시 경(발렌시아에서는 10시 반이나 11시에 시작된다)에 챙겨 먹는 끼니로 간단한 샌드위치나 빵, 음료 등으로 구성이되어있다. 간단하게 크로와상 같은 빵류와 커피를 마시는 이들도 있고 Pan con tomate(빤 꼰 또마떼) -바게트 같은 빵을 구워 토마토 간 것과 올리브유, 소금을 얹어 먹는 것-가 기본이고, bocata 혹은 bocadillo라고 하여 바게트와 비슷한 빵을 반으로 잘라 하몽, 감자, 참치, 오징어 튀김 등 다양한 속재료를 채워 넣은 샌드위치를 음료(종종 맥주)와 곁들이기도 한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에게는 꽤 유용한 정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각종 바나 레스토랑에서는 알무에르조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 외에는 알무에르조 메뉴를 주문할 수가 없으니 유의하셔야 한다.
특히나 Pan con tomate는 강력히 추천하는 메뉴이다. 매우 단순한 음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상상 외로 맛이 좋으니 꼭 드셔 보시길!


알무에르조를 마치고 다시 일에 집중하다 보면 대망의 점심시간 꼬미다(comida)가 다가온다. 스페인의 점심식사 시간은 2-4시 사이로 레스토랑을 제외한 많은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뭐 하고 있는 것이냐고 의아해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만큼 스페인 사람들에게 점심식사는 하루 끼니 중 가장 중요하다. 회사와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근처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게 된다. 점심식사는 주로 3가지 정도의 코스로 구성이 되는데 샐러드나 수프를 먹는 primero, 육류나 생선류 혹은 쌀이 들어간 빠에야를 먹는 segundo, 과일이나 케이크 등의 디저트류를 차나 커피와 곁들이는 postre의 순서로 먹게 된다.

또한 점심식사는 단순히 잘 먹기 위함이 아니라 가족 혹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Socializing을 하기 위한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에 할애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길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진다. 아무도 밥을 한 시간 넘게 먹는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십여분 만에 밥을 삼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한국식 점심식사에 익숙했던 나는 스페인 생활 초기에 매번 내 접시를 후다닥 끝내고 다른 사람들을 뻘쭘하게 기다리기 일쑤였다.
먹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먹고살자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값비싼 재료나 호화스러운 상차림이 아니어도 제철의 신선한 재료에 정성이 곁들여진 밥을 든든하게 먹을 때면 위장뿐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해지고 포만감이 들게 된다.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더라도 밥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관계"이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성장시켜 나간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관계를 다져나가는 기본 멍석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식사 시간인 것이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문화겠지만 여행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여유로운 생활방식을 따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손에서 놓지 못하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앞에 앉은 상대방의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천천히 음식의 풍미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작은 즐거움이 선물처럼 당신에게 찾아오지 않을까.
점심 식사 얘기를 하다 보니 Menu del dia를 빼놓을 수 없겠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세 가지 코스로 식사를 할 수 있는 메뉴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을까 싶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각각의 접시를 의미하는 "메뉴"도 아닐 뿐 더러,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그날의 특선 요리도 아니다.
Menu del dia는 바나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빵, primero, segundo, postre, 음료수로 구성된 점심 식사를 지칭한다. 가격대가 10-14유로 사이로 책정이 되어 있어 현지인들 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에게도 이로운 관습이 아닐 수 없다. 이 메뉴 델 디아가 시작되게 된 것은 1960년대 여행부 장관의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이 정책이 법적으로 시행되기 전부터 이미 레스토랑에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적당한 가격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해 왔으나 이 정책으로 인해 점심식사 세트 메뉴를 정해진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 의무 사항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menu turistico", 이것은 이후 "menu de la casa"로 그리고 다시 지금의 "menu del dia"로 바뀌게 된다. 정부 차원에서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식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니 다시 한번 그들에게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또한 이를 통해 -10유로가 있는-누구나 하루 중 한 끼는 평등하게 질이 좋은 혹은 적당한 식사를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시사점이 많은 제도가 아닌가 한다.

* Sobremesa(소브레 메사)문화
소브레메사는 식사(주로 점심 식사)후, 디저트가 나오면서 갖는 소화와 사교를 위한 일종의 브레이크 타임이다. 대략 30분에서 1시간, 그룹의 성격(수다쟁이 친구들과 함께 한다거나 혹은 가족 모임일 경우)과 식사를 하는 장소에 따라 몇 시간이 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2차로 커피나 디저트를 위해 장소를 이동하는 것과 대조되는 문화다.(우리 신랑이 한국에 처음 와서 놀랬던 부분 중 하나란다. ㅎㅎ) 이 시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식탁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교 시간을 갖는다. 티나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역에 따라 licor(알콜 음료), Chupito(한 모금에 먹을 수 있도록 서빙되는 알콜 음료, 허브주나 미스뗄라, 이탈리아 리몬첼로, 브랜디 등등)를 마시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레스토랑에서도 디저트를 다 먹었다고 해서 빨리 나가라는 신호를 준다거나 채근을 하지 않는다. 스페인 사람들은 설령 밤일지라도 커피를 주문하며 끝없는 대화를 이어 간다.
문화가 이렇다 보니 사업상 관계자들과 식사를 할 때도 중요한 사업 얘기는 식사 중간이 아니라 이 소브레 메사 중에 이루어지는게 보통이란다. 그러다보니 노르웨이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적응하기 힘든 문화로 비춰지기도 한다.
나도 스페인 사람을 닮아가나 보다. 말이 많아진다. 꼬미다를 뒤로 하고 메리엔다(merienda)로 가야 할 때이다. 상당한 양의 점심을 먹고 일터로 돌아가거나 혹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다 보면 어느새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배도 꺼지고 나른함이 몰려온다. 그때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메리엔다이다. 주로 차나 커피에 달콤한 케이크나 빵류 등을 곁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후와 저녁을 버텨낼 에너지를 보충하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탄수화물 및 당의 섭취가 지나치게 높은 것 같지만 한 번 익숙해지면 벗어날 수 없는 습관이기도 하다.
하루가 저물어가고 가정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 보면 오늘 여정의 마지막인 저녁 식사, "세나(cena)"에 도달하게 된다. 꼬미다와는 다르게 세나는 정해진 틀이 없다. 점심보다 가볍게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외식을 하게 된다면 점심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을 섭취하기 일쑤다. 우리 가족의 경우 간단한 샐러드나 수프에 생선류 등의 단백질이 포함된 메뉴를 추가하여 먹는다. 하지만 친구들과 외식을 하게 된다면 식사의 시작이 9시반이나 10시가 되는 것이 보통이며 실제 레스토랑들도 8시 반부터 문을 연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하고 소브레 메사를 하고 또 간단하게 다른 음료를 마시고 다음 날 멀쩡히 출근을 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끔은 정말 존경스럽다.
이리하여 모든 식사를 마쳤다. 하루 중 허기가 지는 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촘촘한 시간표이지만 실제로 먹는 양 자체는 많지 않고 조금씩 자주 먹는 개념에 가깝다. 이 모든 끼니를 매일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비용 역시 만만치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스페인의 생활 물가는 상대적으로 낮을뿐더러, 발품을 팔아 여러 마켓들의 가격을 비교하다 보면 신선한 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경제 상황이 어렵고 최저 임금마저 선진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인 스페인에서 일반 사람들이 큰 무리 없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준다는 생각을 해본다.
엥겔지수가 높을수록 소득 수준이 낮다고는 하나 이 법칙이 간과한 것이 행복지수가 아닌가 한다. 배가 고픈데 당신은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가. 배가 고픈 상태가 며칠이고 지속되는데 먹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소득 수준이 낮다고 해도 일정 수준의 먹거리와 식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 그렇게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 그러하기에 그들이 삶에 대해 여유롭고 낙천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기쁨을 맛보고 타인과의 교류를 이어나가는 스페인 사람들. 그들을 보며 왜 우리가 이리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